2024. 1. 12. 20:42ㆍ커뮤/로그
어릴 적 봤던 동화에선, 늘 주인공이 멋있는 왕자님을 만난 후 서로 사랑에 빠졌다. 그러고는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했으며, 서로에게 평생을 약속했다.
그들의 주위에선 그들과 친한 사람들이 사랑을 축복해 줬고,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났으며, 새들은 고운 노래를 지저귄다.
나도 그런 사랑을 할 줄 알았다.
내 인생에서 어느 날 누군가가 벼락처럼 찾아와 나를 사랑해 줄 것이라고, 그렇게 모두에게 축복을 받고 서로를 향한 마음으로 남은 평생의 시간을 보낼 것이라고,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행복에 겨워 어느 말로도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기쁠 것이라고.
그러나 내게 주어진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나는 부서진 환상을 겨우 품에 안아 들은 채 한적한 시골로 향했다.
뒤엔 푸르른 산이 있고, 앞엔 끝을 알 수 없는 드넓은 바다가 존재하는 곳.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너를 마주했다.
마치 심해를 담은 듯한 머리카락에, 차분히 묶어 올린 뒷머리. 레몬과 같이 상큼한 듯한 눈 위에는 너를 좀 더 모범생처럼 보이게 하는 동그란 안경. 그리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세라복······
그리고 이름은, 深海星.
심해, 별.
그리고 반갑다고 인사해 주는 너의 차분한 목소리와 눈빛···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너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네게 빠져든 지가 1년, 하고 반년 정도 흘렀을 때, 나는 너를 잃었으며 어느샌가 너를 다시 찾게 됐다.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나는 엄연히 죽은 몸이고, 너는 산 몸인데. 기이하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그렇게 기이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를 며칠··· 이곳은 상당히, 너와 내가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그 마을 같다.
뒤엔 푸르른 산이 있고, 앞엔 끝을 알 수 없는 드넓은 바다가 존재하는 곳.
그리고 너는 여전히 내 앞에 존재한다···.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폭죽이 하늘로 향해 올라가다가, 예쁜 빛을 내며 터진다. 또 다른 폭죽이 올라가다가, 또다시 터진다. 그러기를 계속 반복하는, 어느 한낮의 불꽃놀이. 그런 시간의 흘러감을 가만 보고 있다가, 너는 내 어깨를 톡톡 쳤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토끼 인형을 내밀고는, 선물이라는 말과 함께 내 손에 쥐여준다. 뭐야, 이건. 언제 샀어? 라는 말을 하며 네가 분주히 움직이는 것을 지켜본다. 그러고는 네가 꺼낸 것은 다름 아닌 낡은 분홍색 리본. 이게 뭘까, 하는 마음에 네가 하려는 말을 기다리고는 가만히 듣는다.
대체 언제 산 거람. 아, 네가 묶은 리본이랑 똑같은 거야? 오호라, 커플템 추가네. 아··· 어쩐지. 분홍색이더라. 내가 분홍색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고마워, 세이.
···.
···.
10년 전의 축제날···이면, 18살 때? 기억나지, 그럼. 아— 불꽃놀이도 기억나네. 그때 참 신기하게 봤었는데. ···말하고 싶던 거? 우리 모범생 씨가 뭘 말하고 싶었을까. 궁금하네. ...뭐어, 누구든지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히 곁에 있을 거라 생각하니까.
···.
도대체 겁쟁이 타령은 언제까지 할 거야, 바보야. 누구나 좋아하던 사람이 사라지면 힘든 거 아니겠어? 솔직히 나 같아도 힘들었을 테니까.
······그게 네 마음이구나. 그래, 너의 진실된 마음.
...
나도 너를 오래전부터 좋아해 왔어. 그래, 아마 첫 만남서부터. ······말할 수 없었어. 나는, 네 곁에서 당연히 떠나갈 수밖에 없으니까. 내가 네게 마음을 고백한 후 사라져 버리면 분명 지금보다 더 힘들어할 것 같아서, 말을 안 꺼냈던 건데.
···좋아. 세이, 네가 만약, 내가 사라진 여름을 견딜 수 있다면······
내가 너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여름으로 살아가는 것을 허락해 준다면. 그러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많이 좋아해, 세이.
고마워. ······미안해.
내 마음 알지?
—사랑이란 거, 굳이 멋있는 왕자님과 공주님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