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7. 22:47ㆍ커뮤/로그
기억을 더듬어 보자.
푸른 추위가 온몸을 감싸 돌고 있는 지금, 너와 나의 시작을 떠올려 보자.
그러니까,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된 그 순간부터······ 그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너를 사랑하며 마음 깊숙한 곳으로 다가왔던 감정들이, 다시금 나의 마음을 찔러주기를 바라면서. 결국 내가 네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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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하게 기억나는 쪽이 더 힘들까요, 아니면 모든 것을 거의 잊어버린 쪽이 더 힘들까요-?
...생생하게 기억나는 게 더 힘들지. 모든 것을 거의 잊어버린 건, 아쉬운 감정밖에 들지 않지만. 모든 것이 기억나는 건 말이야······.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있었나.
있긴 있었지, 그래. 19살 전 까지는······.
나는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나의 일생은 그다지 순탄하고 행복한 편이 아니었기에, 누군가에게 그 일들을 말하게 됐을 때 받게 될 그들의 시선과 가식적인 동정이 싫었다. 불쌍하네. 이제 어떡하니? 네게 동생도 부모님도 아무것도 남지 않아 버렸네. 사정이 참 딱하구나. ···따위와 같은 말들. 그것을 혐오했고, 두려워했으니, 나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것을 기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너는 그들과 달랐다.
나의 말을 듣고 멍하니 쳐다보는 너를 보고, 아, 너도 내게 거짓된 연민을 하겠구나, 싶었다.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말이다···.
허나 나의 말을 들은 너는, 생생하게 기억나는 쪽이 더 힘들지, 아니면 모든 것을 거의 잊어버린 쪽이 더 힘들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뭘까. 너는 왜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궁금했다. 그저 남들이 내게 했던 것처럼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어도 됐을 텐데. 그렇게 남을 위하는 자비로운 이미지의 너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순순히 답했다.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은 처음이어서.
모든 것이 기억나는 건 말이야······. 그 아이와 관련된 나의 모든 행동들마저 수면 위로 올라와. 그래서 말이야, 멀쩡히 살아갈 수가 없어.
말을 해 놓고도 대답을 한 스스로가 어이가 없었다. 내 얘기를 들은 너를, 아마 얘가 왜 이러나- 라고 여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화제를 돌리려 가벼운 척 표정을 짓고는 네게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너는··· 평소의 장난스러운 감정과 이상한 흥분에 담긴 웃음을 어느샌가 집어넣고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나를 쳐다보았다. 가끔 그렇잖아요. 꿈인 것 같고, 집으로 돌아가면 있을 것 같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네가 나와 비슷한 사람인가. 라고 감히 생각했다가, 아니야. 이건 너무 나 혼자 설레발치는 것일 거야. 라는 생각을 뒤이어했다. 하지만 나도 집에 갈 때마다 늘 느꼈던 감정이라 도무지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조차 거짓된 것 같고, 나 홀로 남겨진 것이 꿈인 것 같을 때. 이제 이 꿈에서 눈을 뜨고, 집의 문을 열었을 때 나를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으로 향해 안겨야 하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꿈에서 깨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그리고, 나는 영영 이 잔혹한 현실에서 깨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할 때마다··· 물이 마을을 단번에 휩쓸듯이, 또다시 고통에 휩싸이고는 했었다. 무엇보다, 이런 고통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조차 곁에 있지 않아서, 더 괴로웠다. 이젠 옆에 사람이 있지를 않아서.
그러나 이제는··· 나와 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이 존재하게 됐다. 대화 몇 번 했다고 너에 대해서 전부 알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와 비슷한 일이 있었고, 비슷한 상실을 겪었으며, 여전히 아픔과 외로움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같이.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 그리고······ 또, 어땠더라.
구름이 낀 것 마냥 잔뜩 흐려진 기억 속에서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한 추억을 전부 떠올리기는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깜빡인 것인지, 아닌지조차 모르겠지만. 다시 천천히 떠올려보자··· 너와 함께 했던 기억들을.
너는 내가 강하든 약하든, 나를 좋아한다 해줬었어. 강함과 약함의 여부를 떠나 나 그 자체를 좋아한다고. 이런 유약한 부분이 조금 더 진실된 나의 모습인 것 같다고···. 그런 말에 네게 점차 의지하게 됐었지. 그리고 또, 너는 나를 어린애 취급했었지. 어쩔 때는 큰아들 같다고 했었는데. 기억나? 원양아. 그래서 네게 어린아이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아 바보같이 입을 맞췄을 때도 있었잖아. 네게 마냥 어린 아이나 자식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과 나를 다른 방향으로 사랑해 주었으면 해서. 조금 더 내가 특별해지길 바라서. 네 볼에 입을 맞춘 후, 네가 나를 바라보던 시선이 정말 웃기고 귀여웠는데 말이야. 날카롭고 멋있는 눈매가 순식간에 둥글어져서 나를 쳐다봤을 때, 얼마나 네가 사랑스러웠는지. 너는 아마 모를 거야.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이 얼마나 거대한지······. 이런 나의 마음을 10분의 1 정도만 알 수 있었다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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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양아. 아직도 기억해?
함께 바다를 거닐고, 손을 깍지 껴 잡고. 나의 차가운 손과 너의 차가운 손이 만나 따뜻한 온도를 만들어 냈을 때가.
그 섬에서 나가면, 함께 청포도 에이드와 초코 라떼를 마시기로 했었던 약속도.
내가 너에게 준 만년필도, 목도리도. 전부 다 간직하고 있을까,
그 물건들을 보면서 너는 나를 떠올리며 추억하고 있을까.
원양아. 나는 아직 너에 대해 잘 알지 못해. 그 짧은 시간에 어찌 너에 대해서 전부 알 수가 있겠어.
그러니, 아직 너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아쉽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해. 아마 너도 나의 전부를 알진 못할 것이고.
그렇지만, 이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의 나는 깊고 깊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심해에 여전히 가라앉고 있지만.
언젠가 너는 그런 나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차갑지만 다정한 손을 나를 향해 뻗을 것이라는 것을.
그런 만큼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감히 확신하고 있어.
나도 네가 시야에 들어오면, 있는 힘없는 힘 전부 쥐어 짜내서. 죽은 몸을 살려서라도······ 너에게 손을 뻗을 수 있어. 충분히.
나 또한 그런 만큼 너를 사랑해. 너를, 영원히 사랑할 거야.
그래. 이렇게까지 되어 버렸는데, 내가 어찌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사랑을 갈구하던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 버렸으니.
원양아.
거듭해서 말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해.
심해[深海]에서 원양[願洋]을,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진부한 말이라고 들릴 순 있겠지만, 너는 내게 있어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야.
너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의 생각을 바꿔 주었고, 텅 빈 나의 심장을 너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줬어.
내가 고통에서부터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줬고, 그런 나의 손을 잡아서 앞으로 이끌어줬지. 나를 구원[救援] 해 준 셈이야.
아, 그래. 어쩌면 계속해서 네게 하고 싶었던 말이 이거였을지도 몰라.
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자, 너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었던 것.
우리 함께 영원을 새끼손가락에 걸어 약속하자.
평생을 사랑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