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살길 바랐지만. 너무 늦은 대답인가.

2024. 4. 21. 23:45커뮤/로그

 

 

"···너의 그 이기적인 선택이 사람 하나 살린 거야, 멍청아."

 

당신의 새하얀 뒷머리를 쓰다듬는다. 부드럽다. 나랑 비슷한 길이의 머리카락은, 유난히 어색하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당신은 늘 머리카락을 묶었었지. 묶지 않은 날에, 나는 늘 새로워했다. 오, 뭐야, 지은우. 스타일체인지. 심경의 변화? 뭐냐. 애인이랑 헤어진 것도 아닌데. ㅋㅋ. 머리끈이 끊어졌다고? 아니, 멍청아. 사면 되잖아. 왜 그렇게 불편하게 있어. 나? 나야 뭐, 맨날 이대로 다니니까 불편하진 않지. 익숙한 거야. .....바보 똥개라고? 이 미친, 너 말 다 했냐! ···그날의 기억이 잠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당신의 목소리가 흐리게 떠오른다. 벌써부터 네 목소리를 잊으면 안 되는데. 어떡하지.

 

"씻기지도 않고, 놓이지도 않으니까. 나는 너의 흔적이 필요해. 그 흔적마저 없어진다면······. 살아나갈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말이지. 그렇게. 너는 평생 내 오점이 돼서, 나와 평생 살아가는 거야. 넌 죽지 않아. 내 마음에 평생 살아있을 테니."

 

당신의 발음이 점차 뭉개지고, 웅얼거리는 걸 고스란히 듣는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아. 난 여전히 너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아니, 애당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를 마음 놓고 편히 보낼 수 있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얼마 살지 않은 아이들이 서로 작별 인사를 할 때도 울던데. 거의 20년을 넘게 지내온 나는. 너를 어떻게 떠나보내야 하냐? 야. 대답 좀 해봐. 응?

···당신의 말 들으며, 저도 계속해서 답장하듯이. 당신의 말에 맞추어 사랑한다고 대답한다. 느려지는 당신의 템포와는 다르게, 아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속삭인다. 크게 말하면 당신이 귀를 아파할까. 그렇다고 너무 작게 말하면, 당신이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듣지 못할까 봐. 당신의 말을 그 어느 때보다 경청한다. 목소리가 세상으로 흩어져 사라지기 전에. 12월의 낙엽잎처럼, 잘게 잘게 부서지기 전에. 작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민들레 홀씨가 되기 전에. 내가 당신의 목소리를 영원토록 기억할 수 있게·········.

아. 진짜 어떡하지. 나 얘 없이 할 수 있는 거, 아무것도 없는데. 어떡하냐, 은우야. 나, 맨날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네가 늘 내 곁에 있어서였는데. 우리 엄마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도, 네가 있어서 이겨낼 수 있었던 건데. 난. 네가 내 옆에 있어서 살 수 있었는데. 너는 나의 삶의 이유이자 내 삶 그 자체였는데. ···야. 새장에 새가 없으면 어떡해. 새장 안에 새가 있는 건 당연하잖아. 왜 깃털만 수북이 남겨두고 떠나. 그 깃털들로 너를 추억할 순 있어도, 그게 너인 건 아니잖아. 네가 남긴 파편이잖아. 이거 가지고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네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으면 안 되지, 지은우. 응? 야. 대답해 보라고.

 

사람의 청각은, 사람의 신체 기관 중 가장 마지막에 죽는다고 했던가. 그래. 당신은 귀가 유난히 밝았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샌가 그는 대답 없는 사랑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더 이상 대답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당신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들을 수 있도록. 당신의 기억 속 마지막 말이 내 목소리의 사랑해일 수 있게. ······더 호흡하지 않는 당신의 심장에 반비례해서, 그의 호흡은 더욱 가빠진다. 마치 당신의 숨을 빼앗은 것 마냥. 헐떡거린다. 고요한 당신에 비해, 심장박동이 불규칙해진다. 아프다. 너무 고통스러워. 말로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몸의 전체를 덮는다. 가시 돋친 장미 줄기가 발끝부터 머리까지. 전체를 에워싸는 것 같다. 몸에 힘이 너무 강하게 들어간다. 아. 이렇게까지 당신을 세게 쥐면, 당신이 아파할 텐데. 그는 허둥지둥 몸을 떼려다가, 멈춘다. 이제 더 이상 아파할 일이 없으니까. 당신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 살아있지 않으니, 아파하지도 않는 거다. 아파하지 않아? 그럼. 나도 지금 이 절벽에서 몸을 던져버리면. 아프지 않게 되는 거야? 절벽에서 지면에 닿는 그 순간만큼은 아프겠지만. 그것만 견디면 전부 끝이다. 그는 고개를 절벽의 끝으로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절벽에 위태로이 서있는 꽃 한 송이에 고정되었다. 조금만 다리에 힘을 쓰면 돼. 조금만. 저기까지만 걸어가자. 그 정돈 할 수 있잖아. 그래. 차라리 기어갈까. 그게 더 편할 수도 있어. ···난, 더 이상. 고통받고 싶지 않아. 전부 외면하고 싶어. 이 삶 자체에서. 그러면. 그렇다면-

 

 

 

···미안해.

 

지은우?

 

하지만 나는 여전히, 네가 살아줬으면 해···.

 

은우야.

 

내 마지막을 바친 세계가,

 

야, 이 새끼야. 이런 걸로 장난하지 말라고 했지.

 

나한텐 잔인했던 세계가 너한텐 조금이라도 상냥하기를.

 

그래. 이번만 봐줄 테니까.

 

내가 만끽할 수 없었던 세상을 느끼고 오기를.

 

그니까. 이제 눈 뜨고, 같잖은 장난 그만 쳐.

 

···그러니까, 난···.

 

이런 거 싫다고. 내가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거면, 너 안 했잖아.

 

···네가 살아갈 수 있도록, 몇 번이고 말해줄게.

 

은우야,

 

평생 너의 곁에···

 

은우야.

 

너의 하늘에···

 

제발.

 

네가 내 세상이 되어주었듯 내가 남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내 곁에서 떠나지 마.

 

은우야.

 

내 말 들려?

 

대답 좀 해보라고.

 

욕을 하든. 뭘 하든.

 

은우야.

 

은우야···.

 

·········지은우···.

 

 

 

 

 

끝끝내 대답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끄러운 두 아이의 수다로 가득 찼던 이 공간에는 침묵만이 맴돈다

그러다 한 사람의 고통이 적막을 깨운다

행복이 들이찼던 공간은 고통으로 빼곡히 차게 된다

 

그 속에서

반지에 박힌 보석이

이기적일 만큼 푸른빛을 내는 채로

살아있는 자와 눈을 맞추며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저 그럴 뿐이었다

 

 

'커뮤 >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後悔의 生에서  (1) 2024.05.18
언젠가  (0) 2024.05.18
나는·········.  (2) 2024.04.20
利己的 贖罪  (0) 2024.03.30
深海에서 願洋을  (1) 2024.03.07